<마교>와 <천하무림협의연맹>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조보다는 사람들 얘기, 예를 들자면 마교 교주 이전에 아버지인 이청문,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옆에 있던 친구나 부하들의 모습 같은 가족적인 얘기에 독자제현이 호응을 해주신 것 같다. 혼밥혼술 시대에 '같이 어울려 산다는 것'은 잃어버린 화두 같은 게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계속 인간의 정에 초점을 맞춘 무협을 쓰고 싶다.
난세엔 온갖 유형의 영웅과 효웅들이 들끓는다. 권력과 야망을 향해 치열하게 치달려 가는 뭇 영웅 군상 속에 주인공은 혼자 표류하는 존재다. 현재의 표현으로 하면 주류에서 완전 밀려나 있는 '아웃사이더'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환관, 그것도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애비가 거세해준 몸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도 없이 살아가는 존재다. 주인공의 유일한 강점은 마음속에 따듯하게 타오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정, 한 자루 촛불 같은 거다. 허나 이 촛불이 끝내 천하대권을 노리는 영웅들을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시발점이 된다. 작품을 보면 아시겠지만 컬러를 하는 과정이며 기본 뎃생, 조연급 의상까지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고자 노력한 작품이다. 비용면에서도 일반 제작비의 몇 배가 들어갔다.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
웹툰과 출판만화는 아예 장르 자체가 다르다. 거의 영어와 수학의 차이다. 허나 문법 자체는 차이가 있어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무장을 해제하고 만나는 '만화'라는 틀 속에 같이 공생하고 있다. 밥상에 고기반찬이 있으면 나물반찬도 있어야 하고 국도 있어야 하듯 작가라는 존재는 '맛'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어머님이 부엌에서 끓여 주시는 김치찌개의 '맛'이 십 년 뒤라고 변하겠는가. 그동안 역사소설, 추리소설, 드라마, 영화시나리오 쪽의 글도 많이 썼지만 결국은 '맛'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과정이란 것은 똑같다. 아마도 관을 바로 옆에 두고 있을 때까진 '맛'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길을 포기하진 않을 것 같다.(웃음)
무협은 매우 독특한 장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길을 가다 한 대 맞거나, 가족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일단 법에 의지하는 준법적인 성향이 있다. 세상의 많은 문학 장르 중에 무협은 '복수'가 허용된 거의 유일한 장르다.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이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하는 얘기와는 궤도 자체가 다르다. 직장 상사에 치이고, 술집에서 문신한 깡패가 시비 걸까봐 두려워하며 월급 몇 푼에 목숨을 거는 소시민에게 무협이란 '자기만족'과 '대리성취'를 동시에 해주는 청량음료 같은 장르다. 지나친 폭력의 미화, 어려운 한문, 정체불명의 시대 등으로 저급 장르로 인식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대중문화라는 것은 입으로 먹는 상수도문화보다는 배설하는 하수도문화의 기능이 있다. 커지는 빈부의 격차와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래서 무협엔 위기라는 것이 없다. 다만 '잘 쓰는 작가'가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일단은 웹툰을 쓰고 싶다.(웃음) 야설록이란 필명의 역사는 도전의 역사다.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할 때 SF장르인 <아마겟돈>, 전쟁장르 <남벌>을 썼다. 이때만 해도 SF나 전쟁만화는 작가의 무덤이었다. 무협소설 최초로 죽는 주인공도 만들어 봤고, 진짜 악당인 주인공도 만들어 봤다. 하이텔, 천리안 시절에 통신드라마란 것도 만들어 봤고 일본의 <수병위인풍첩(무사 쥬베이)> 같은 무협성인애니메이션도 도전해 봤다. 글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영역에 도전을 해봤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내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은 35년 창작의 결과물 같은 것이다. 22살 철없던 시절부터 3, 40대의 질풍노도를 지나 이제는 좀 더 차분하고 깊이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으로 스스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느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바로 글쓰기라는 것이다.
22살 때 <강호야우백팔뇌>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최근의 <건곤일월>까지 35년간 어리석은 작품을 마냥 성원해주신 독자제현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오만 권세(?)와 방종, 일탈을 누릴 만큼 누려본 것 같다.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권력자의 말로가 비참하듯, 작가 또한 작가의 모든 힘은 독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상일이 어렵고 힘들 때 야설록이 쓴 한 줄의 글이 손톱만큼의 위안이나 만족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작가의 행복이고 바램이다. '일자일혼(一字一魂)'. 글자 하나에 혼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다.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는 작품을 만들겠다. 그것이 아마 35년간 야설록을 읽어준 독자제현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 될 것이다.